손으로 써 내려간 불심, 사경
불경을 손으로 써 내려가는 것은 부처를 찬양하고
그 말씀을 전하는 신앙 행위였다.
값비싼 재료로 정성들여 쓰고 화려한 장식을 더하여
부처를 향한 경외심을 극대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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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가 신을 찬양하는 도구로
인쇄술은 문자를 많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러나 문자 향유의 확대는 신의 축복이 아닌,
문자를 통해 소통하고자 했던 문자 혁명의 길,
누구나 문자를 누리게 되기까지
문자 혁명,
소수의 손에 독점되던 시대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신이 인류에게 내려준 축복과도 같았다.
인간의 노력과 의지로 이루어 낸 혁명이었다.
한국과 독일에서는 이 길이 같고도 다르게 펼쳐졌다.
한국과 독일의 문자 이야기
신의 말씀과 행적을 찬양하기 위해 정성스레 필사하여 만든 책은 소수에게만 독점되었다. 문자의 향유는 부의 상징이자 특권이었다.
사
경
불경을 손으로 써 내려가는 것은 부처를 찬양하고
그 말씀을 전하는 신앙 행위였다.
값비싼 재료로 정성들여 쓰고 화려한 장식을 더하여
부처를 향한 경외심을 극대화했다.
화엄경은 부처의 깨달음을 그대로 설법한 것이다. 감색 종이에 금먹으로 글씨를 썼으며 앞부분에는 부처의 설법 장면이 변상도로 그려져 있다.
흰색 종이에 금먹으로 글씨를 썼다. 고려의 불교 신자들은 법화경을 따라 읽고 베껴 쓰고 외우고 소지하면 공덕을 얻는다고 생각했다.
유럽 중세 시대에 신의 말씀은
수도원에서 성직자들의 필사를 통해 전승되었다.
금박과 은박, 채색과 삽화, 장식 등으로
화려함을 더한 성서는 소수의 전유물이었다.
신 앞에 무릎을 굽힌 수도사를 두문자에 그려넣었다. 화려한 금박과 채색으로 신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했다.
한 필경사가 자신이 쓴 필사본을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바치고 있다. 필사본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으며 양피지 또한 쉽게 구할 수 없는 값진 것이었으므로, 필사본 책은 매우 귀한 것이었다.
인쇄술의 발명은 많은 사람들이 문자를 사용할 수 있게 만든 혁명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필사보다 복제가 쉬워졌으며 지식과 정보가 더 빨리 더 널리 공유되기 시작했다.
금
속
활
자
고려에서는 13~14세기에
세계에서 가장 먼저 금속활자를 만들어 책을 인쇄하였다.
고려를 이은 조선은 국가의 주도로 수십 차례 활자를 만들고
인쇄, 출판 사업을 주도하여 문치주의를 실현하였다.
청주 흥덕사에서 1377년에 금속활자로 간행한 책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이다. 2001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대학연의>는 유교 경전 <대학(大學)>의 뜻과 이치를 해설한 책이다. 제왕의 지침서로서 세종을 비롯한 역대 왕들의 필독서였다. 세종의 명으로 만든 금속활자 갑인자(甲寅字)로 인쇄했다.
세종이 조선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주석을 달아 편찬한 중국의 역사서이다. 세종이 인쇄술 개량을 통해 만든 갑인자(甲寅字)로 인쇄했다.
영조 48년에 세손(世孫)이었던 정조의 명으로 만든 금속활자이다. 세종 시대에 만든 갑인자(甲寅字)를 본떴다.
값비싸고 귀한 필사본의 권위를 떨어뜨린 것은
1450년대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400?~1468)가
발명한 금속활자 인쇄술이었다.
1999년에 지난 1000년 동안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위에 구텐베르크가 꼽힐 만큼
서양에서 인쇄술의 발명은 혁명적인 일이었다.
구텐베르크가 인쇄한 초기 활자본으로 전 2권, 총 1282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구텐베르크는 이 성서의 인쇄를 위하여 290개의 서로 다른 자모(字母)를 만들었다. 초기 인쇄본은 필사본의 서체를 따라 만들어졌으며 두문자와 장식 등을 손으로 직접 그려 넣어 책마다 모습이 다르다.
필사본 시대에는 책 1권을 만드는 데 대략 2개월이 걸렸으나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개량 이후로는 일주일 동안 책 500권 가량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한다. 1450년부터 1500년까지 반세기 동안 유럽 각국에서는 2000만 권에 달하는 인쇄본이 만들어졌다.
1 구텐베르크가 성서를 인쇄한 곳 / 2 구텐베르크 동상 / 3 구텐베르크 동상 / 4 구텐베르크 생가 / 5 마인츠 성당과 광장 / 6 구텐베르크가 세례를 받은 성 크리스토프 교회
인쇄술로 인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책을 소유하게 되었지만,
한국은 한자로 독일은 라틴어로 책을 만들고 나누었기 때문에 입말과 글말이 달랐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만들어 문명의 길을 열었고, 독일에서도 독일어 인쇄물이 나오기 시작한다.
한
글
인
쇄
세종은 말과 글이 다른 언어생활의 어려움을 통찰하고
일반 백성들도 쉽게 익히고 쓸 수 있는
자국어 문자인 ‘훈민정음’을 창제한다.
세종이 직접 지은 한글 노랫말이다. 훈민정음 창제 후 처음 간행한 한글본 중 하나이며, 한자를 병기할 때 한글 아래 작은 글자로 한자를 사용한 것 이외에는 한글을 사용하여 인쇄했다. 한자는 세종이 만든 갑인자로 인쇄했고 한글은 훈민정음을 창제한 후 최초로 만든 금속활자로 인쇄했다.
가장 오래된 한글 활자본으로, <월인천강지곡>을 인쇄할 때 사용한 ‘초주갑인자 병용 한글활자’로 인쇄했다. 산문으로 되어 있어 한글 사용의 풍부한 용례를 알 수 있다. <월인천강지곡>과 달리 한자를 큰 글자로 먼저 쓰고 한글을 작은 글자로 썼다.
라틴어로 인쇄본을 출판하던 독일에서도
민간의 전문 상업 인쇄업자들을 중심으로
민중어인 독일어 인쇄 출판이 활발해진다.
독일어 인쇄본은 인기 있는 화가의 삽화가 어우러져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다.
토이어당크(Theuerdank)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 1459~1519)의 명에 따라 만든 이야기 책이다. 기사 토이어당크가 신부를 찾아 떠나는 모험으로, 당시 손꼽히는 르네상스 화가였던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Dürer, 1471~1528)의 삽화가 함께 실려 있어 많은 이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막시밀리안 1세가 이 책의 출판을 위해 만든 고딕 양식의 서체 프락투어(Fraktur)는 오늘날 독일을 상징하는 서체가 되었다.
요하네스 멘텔린(Johannes Mentelin, 1410~1478)은 스트라스부르크(Strasbourg)에서 활동한 민간 인쇄업자이다. 그는 라틴어 성서를 인쇄하며 많은 돈을 벌었는데, 독일어 성서의 수요를 확인하고 구텐베르크 성서가 나온 지 11년 뒤인 1466년, 처음으로 독일어 성서를 만들어 인쇄했다.
뉘른베르크(Nuremberg)의 인기 있는 상업 인쇄업자인 안톤 코베르거(Anton Koberger, 1440~1513)도 독일어에 대한 민중의 수요에 따라 독일어로 성서를 출판하기 시작한다.
15세기의 베스트셀러로, 창조의 순간부터 1490년대까지 세계의 역사를 담았다. 뒤러의 판화 등 645점의 그림도 담고 있다. 대다수의 출판물은 라틴어였으나 자국어인 독일어의 인쇄 출판이 확산되면서 라틴어의 자리를 독일어가 점점 대신하게 되었다. 뉘른베르크 연대기는 라틴어본과 독일어본으로 각각 출판되었다.
한국과 독일 모두 종교와 사상 전파를 위한 번역이 활발해졌다.
한국에서는 왕실 주도로 불교서, 유교서 언해가 시작되고,
독일에서는 루터가 독일어 인쇄물을 통해 종교 개혁을 이뤄낸다.
한
글
번
역
새로 만들어진 글자인 한글을 정착시키기 위해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한문으로 된 책을 한글로 번역하는 것이었다.
조선에서는 왕실의 주도로 경전을 번역하면서
사상의 보급과 함께 한글 사용을 시도하였다.
<번역소학>은 백성들에게 유교 윤리를 가르치기 위해 최초로 한글로 번역한 경서이다. <소학언해>는 <번역소학>의 번역 방식을 바꾸어 간행되었다. <소학>의 언해서가 1,300부나 간행되었다고 하니 한글로 번역된 유교 서적이 조선을 유교사회로 만드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능엄경언해>(1461)는 왕실이 주도해서 제일 먼저 번역한 불경이다. 세조가 직접 번역에 참여해서 제작을 주도하였다. <능엄경언해>에 쓴 한글 금속활자는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에 쓰인 금속활자 다음으로 만든 것인데 앞선 활자의 서체와 달리 붓글씨의 느낌이 난다.
독일의 신학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인쇄술을 ‘복음 전파를 위해 신이 주신 최고의 마지막 선물’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인쇄술은 종교 개혁의 큰 공신이었다.
루터는 1522년부터 죽기 1년 전인 1545년까지 독일어 성서의 내용을 보완하고 출판한다. 라틴어 성서는 소수만 소유하고 읽을 수 있는 것이었으나, 루터의 성서 번역과 출판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성서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루터는 면죄부 남용 등의 행위에 분개하여 비텐베르크 성 교회 대문에 95개조 논제로 알려진 반박문을 게시하였으나 라틴어 인쇄물에 대한 민중들의 반응이 크지 않았다. 벽보를 독일어로 요약하여 다시 배포하면서 서양사를 뒤흔든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루터가 성서에 근거하지 않는 교회의 모든 권위를 부정하자 교황 레오 10세(Leone X) 등은 루터에게 주장을 철회할 것을 명령하는데, 이에 대한 루터의 독일어 입장문 중 하나이다.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 독일에서는 라틴어를 대신하여 독일어 인쇄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7배 상승했다.
1 비텐베르크 시청 광장의 루터 동상 / 2 루터 나무(Luthereigh) / 3 루터하우스(Lutherhaus) / 4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붙인 슐로스 교회 / 5 슐로스 교회의 문
자국어 출판으로 인해 독자층이 확대되고 다양한 분야의 인쇄본이 만들어지면서
문자를 통한 소통과 향유가 확산되었다.
출
판
의
확
산
인문, 철학,
과학, 실용 등
장르의 확산
1525년에 전염병이 급격히 번져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이를 안타깝게 여긴 중종이 전염병의 치료법을 간행하도록 지시하여 만들어진 책이다. 더 많은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한글로 보급했다는 점에서 중종의 애민정신을 보여준다. 불교나 유교와 같은 종교 서적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책이 만들어졌음을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본이 될 만한 효자, 충신, 열녀의 이야기가 삽화와 함께 수록되어 있다. 1434년에 처음 간행된 <삼강행실도>는 도판을 통해 그 내용을 보여주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문으로 인쇄되었기 때문에 읽을 수 있는 사람이 한정적이었다. 한글로 인쇄되면서 널리 읽히기 시작했으며, 뒤이어 간행된 <속삼강행실도>와 <오륜행실도>도 널리 읽힌 교화서로 꼽힌다.
실전 창술과 검술, 기마술 등에 대한 내용이 집대성되어 있는 무예서 <무예도보통지>를 한글로 언해하여 간행한 책이다. 무사들의 실전 교과서이면서 무과 시험을 보기 위해 읽는 수험서이기도 하여 널리 읽혔다.
도교의 경전인 <태상감응편>을 한글로 번역하고 그림과 함께 수록한 초판본이다. <태상감응편>은 좋은 일을 하면 복을 받고 나쁜 일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도교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데, 중국과 조선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역에서 유행하였다.
인쇄술의 발달로 전문 지식과 삽화가 수록된 의학 서적도 널리 생산되었다. 삽화는 목판으로 만들어 가운데에 인쇄했고, 양 옆에는 금속활자를 조립하여 글자를 인쇄했다.
출판업자인 요한 제들러(Johann Heinrich Zedler, 1706~1751)가 라이프치히에서 출간한 사전으로, 총 68권에 이르는 계몽주의 시대 최고의 출판물이다. 백과사전의 편집과 인쇄에 모범이 되는 사례로 꼽힌다.
소설 <아가톤의 역사(Agathons)>로 잘 알려진 독일의 문학가 크리스토프 빌란트(Christoph Wieland, 1733~1813)의 작품집이다. 그는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희곡을 최초로 독일어로 번역해 출판한 사람이기도 하다.
훔볼트(Alexander von Humboldts, 1769~1859)의 역작으로 우주 만물에 대해 다루고 있다. 1845년에 초판이 만들어지고 8만부가 제작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이 "훔볼트가 없었다면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을 쓸 수 없었을 것"이라고 언급할 정도로 훔볼트는 식물학, 동물학, 천문학, 기후학, 광물학, 해양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문학의 발전과
상업 출판이 만든
베스트 셀러
춘향의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판소리 <열녀춘향수절가>로 불리다가 18세기부터 읽는 소설로 정착되었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춘향전>의 이본은 100여 종이 넘을 만큼 다양한데, 언제 어느 곳에서 만들어졌느냐에 따라 주인공의 신분이나 사건 등에 대한 내용이 다르기도 하다.
<홍길동전>은 신분 차별과 사회 부조리에 대한 내용으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다. 한글 소설이 널리 읽혔다는 것은 한글이 대중을 위한 문자로서의 지위를 굳혀 나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글 소설에는 인물들의 감정과 일상이 생생하게 담겨 있어 한문을 잘 아는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육관대사의 제자 중 한 명인 성진이 하룻밤의 꿈 속에서 여덟 선녀들과 함께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깨어나 인간의 부귀 영화는 한낱 꿈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을 얻는 이야기이다. 한글본과 한자본이 만들어지면서 여성과 남성, 평민과 양반, 어른과 아이 구분 없이 두루 읽혔으며 필사본, 목판본, 활자본 등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기원전 6세기 그리스인 이솝(Aesopica)이 지은 것으로, 동물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어린이들에게 지혜와 교훈을 주는 이야기책이다. 1484년에 영국에서 번역본이 처음 인쇄된 이후로 유럽 전역에 퍼지면서 독일어로도 출판되었다. <양치기 소년>, <여우와 신포도>, <거북이와 토끼>, <시골쥐와 도시쥐>, <개미와 베짱이> 등이 수록되어 있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의 소설이다. 약혼자가 있는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서 겪는 마음의 갈등을 편지 형식을 빌어 그려 내었다. 1774년 출판과 동시에 독일뿐 아니라 유럽 전역의 베스트셀러로 떠올랐는데, 당시 많은 유럽의 청년들이 소설에 묘사된 베르테르의 옷차림과 행동을 따라할 정도였다.
그림 형제가 독일의 민담을 모아 엮은 전래 동화집이다. <백설공주>, <헨젤과 그레텔>, <라푼젤>, <개구리 왕자>와 같이 현재에도 널리 읽히고 있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1812년에 초판이 나오자 큰 인기를 얻어 여러 번 간행되었으며 인쇄 서체로 프락투어(Fraktur)를 사용하여 독일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오늘의 우리가 문자로 숨쉬기까지
같고도 다른, 다르고도 같은
한국과 독일의 문자 이야기
한국과 독일의 문자 이야기
2020. 12. 17. ~ 2021. 4. 25.